[다 함께, 기후 리터러시] ③ 극한 기후 속 공동체 감각 세우기
| 우리는 매일 날씨(기상)부터 시작한다. 태양이 일상에 미광을 비추면, 우리는 날씨를 토대로 움직인다. 날씨에 맞는 옷과 신발 등을 입고 사람을 만나면, 날씨 이야기부터 꺼내곤 한다. 날씨에 따라 식사 메뉴를 정하고, 행사나 이벤트가 있을라치면 날씨부터 파악한다. 의식주와 일상은 그처럼 날씨와 ‘착붙’이다. 이런 날씨가 짧은 기간의 대기 현상을 일컫는다면 기후는 오랜 기간에 걸친 평균적인 대기 상태를 뜻한다. 하루가 모여 일주일, 한 달, 일 년이 되듯, 날씨가 쌓여 기후가 된다. 그런 기후가 위기, 온난화(warming)를 넘어 열대화(boiling) 시대다. 이젠 기후에 대한 감각을 깨우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든 시대로 돌입하고 있다. 하늘을 향한 집념에서 기상학이 태어났듯, 일상 속 기후 감수성을 키워야 할 때다. 날씨가 모여 기후가 되듯, 작은 이해에서 시작한 큰 변화, 그 이야기를 나눈다. 기존 인식을 넘어 날씨와 기후를 따라 새롭게 열리는 세상을 이해하고 적응하는 방법을 함께 찾아보자. 푸른아시아 기후와공동체실 김이준수 활동가가 [다 함께, 기후 리터러시] 연재를 통해 작은 쇄빙선(수면의 얼음을 부숴 항로를 여는 배) 노릇을 하고자 한다. |
“그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아스팔트 위에서 열기가 들끓고, 나무들은 바람 한 점 없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_ 한강 《채식주의자》 중에서
숨죽이고 있는 건, 나무뿐만 아니었습니다. ‘극한’의 연속이었던 2025년 여름은 어떤 재해가 들이닥칠지 긴장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는 ‘극한 기후’라고 불러야 할 것 같네요. 기후위기와 연결된 극한 호우와 극한 폭염이 번갈아 닥쳤습니다. 이에 여름이라는 계절의 표정도 바뀌고 있습니다. “여름은 동사의 계절 / 뻗고, 자라고, 흐르고, 번지고, 솟는다”(이재무 詩 「나는 여름이 좋다」 중)라는 광화문글판 문구가 무색해집니다. 어쩌면 앞으로 다가올 여름은 생명과 성장의 감각이 팔딱대는 계절이 아닌 복합적인 재난, 재해, 피해부터 우려하는 계절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사진. 광화문글판 (출처. 교보생명) ]
앞선 글(https://greenasia.kr/greenasia/?idx=166883161&bmode=view)에서 ‘기후 리터러시’를 공동체 역량이자, 공공 인프라로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모든 재난이 그렇듯 기후 재난도 취약한 곳에 피해가 쏟아집니다. ‘기후불평등’입니다. 기후위기 피해가 사회경제적 취약계층에 집중되는 현상입니다. 이들은 기후위기 주요 원인인 탄소 배출이 적은 데도 열악한 주거환경, 건강 문제, 정보 접근의 어려움 등으로 기후 재난에 더 크게 노출돼 있습니다. 극한 기후가 뉴노멀이 된 여름은 이들을 더 힘들고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기후불평등은 지독한 구조적 현실입니다.
기후변화의 재앙 중 하나인 극한 호우는 몇 년 새 여름의 일상처럼 다가오고 있습니다. 기상청이 정의한 바에 의하면, 극한 호우는 1시간에 50mm, 3시간에 90mm를 동시 충족하거나 1시간에 72mm 넘게 오는 비를 뜻합니다. 올여름, 시간당 100mm 안팎의 비가 전국 곳곳에서 내렸습니다. 특히 경남 산청군 시천면에는 나흘간 798mm라는 이른바 어마무시한 비가 쏟아졌습니다. 이러다 보니 수백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비현실적 강우량을 접하는 일도 일상다반사가 되고 있습니다. 연간 호우 빈도를 보면, 시간당 50mm 이상 호우는 1970년대 연평균 8.4회에서 2020년대 23.6회로 늘어났습니다. 근래 극한 호우만 놓고 봐도, 2019년에는 한 차례 있었지만, 2024년에는 시간당 100mm가 넘는 극한 호우가 무려 16번 있었습니다.
장맛비는 과거 양상과 다른 패턴을 보여줍니다. 과거에는 비교적 넓은 지역에 고루 장맛비가 내렸지만, 요즘은 한정된 지역에 순간적으로 많은 양이 세차게 쏟아붓습니다. 기존 강우빈도 등의 패턴에 맞춰진 방수 시설과 재난방재 시스템으로는 감당이 안 되니 피해는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달갑지 않은 기록들이 앞으로 얼마나 갱신을 거듭할지 모르지만, 재난 대책이 과거와 달라져야 함은 분명합니다. 극한 기후를 품은 기후위기에 맞게끔 대책이 이뤄져야 합니다.
여름철 뉴노멀이 된 극한 호우의 원인을 딱 꼬집어 말하긴 어렵다고 합니다. 변수가 워낙 다양한 탓에 대기 구조를 입체적으로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다만 기상 전문가들은 해수면 온도 상승을 원인 중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지구 가열화(Global Heating)로 바닷물이 따뜻해지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증발하는 수증기량이 많아집니다. 대기 수분 함량이 많아진 상태에서 저기압을 만나 비구름대가 커져 포화 상태를 넘어서면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집니다.


[ 사진. 극한 기후1, 2 (출처. 무료이미지사이트 픽사베이) ]
극한 호우가 일정 부분 기후위기 영향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폭염도 마찬가지입니다. 찜통더위라는 말로 부족한 극한 폭염은 ‘열돔(heat dome)’이 빚습니다. 강한 고기압이 정체돼 지표면에서 데워진 열기가 외부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현상을 뜻하는 열돔은 기후위기가 초래한 결과입니다. 북극의 찬 공기와 아열대의 뜨거운 공기를 섞여 온도를 조절하는 제트기류가 북극이 따뜻해지면서 힘을 잃은 까닭입니다. 제트기류는 온도 차가 클수록 빠르고 강해지나 지금은 그렇지 못합니다.
극한 기후에 맞춰 수백 년을 뛰어넘는 인프라를 갖추는 것은 기본입니다. 이에 덧붙여 공동체 감각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극한 기후에 따른 재난을 머나먼 안드로메다 이야기가 아닌 우리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감각 말입니다. 기후위기를 환경 문제로만 여긴다면 큰 오산입니다. 사회적 불평등과 공동체의 문제로 기후위기를 바라볼 때 제대로 된 문제 해결이 가능해집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후 재난은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습니다. 극한 기후 앞에 가난한 사람이, 이주노동자가, 장애인이, 옥외노동자가, 고연령층이, 비인간생물 등이 더워서, 추워서, 비 와서, 불타서 죽습니다. 취약한 부분부터 허물어집니다. 기후 재난은 사회적 격차를 증폭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적 격차는 국가, 사회, 지역, 계층 등을 분리하고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불평등 너머 불평등도 있습니다. 가령 각종 재해를 당하고도 법적 테두리에서 보호나 보상 등을 받지 못하는 이주노동자 등이 해당합니다. 차별 없는 사회안전망 구축과 사회적 기본권 확충이 촘촘해야 할 이유입니다. 기후위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생명을 위협합니다. 누군가는 기후위기를 놓고 계엄을 옹호한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고 늘 있는 일인데, 누가 죽거나 다쳤느냐”며 외면할지 모릅니다. 공동체에 철저하게 해악을 끼치는 언설입니다.

[ 사진. 모두병들었는데 (출처. JTBC '뉴스룸' 화면 갈무리) ]
기후위기는 생명이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더 강력하고 파괴적인 극한 기후가 예고된 시대, 작아도 좋습니다. 공유 우양산, 그늘막 하나, 무더위/한파 쉼터, 생수 등이 생명을 지키는 방패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녀야 할 공동체적 감각은 이렇듯, 작은 마음 씀씀이부터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사람은 심신 한 군데라도 아프면 그곳에 모든 신경이 갑니다. 이런 사람이 모인 우리 사회는 아픈 곳이 많은데, 그만큼 신경을 쓰고 있을까요? 왜 우리는 아픈데, 아프지 않을까요? 더 아래, 밑바닥까지 샅샅이 살피고 보듬을 여력이 없는 걸까요? 더 나쁜 방향으로 갈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와 고통을 내 것 혹은 우리 것처럼 여기거나 여기려고 하는 것이 공동체 감각입니다. 고통의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모두 아픈데 그 아픔을 감지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아픔은 서서히 우리 삶을 갉아먹을 겁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죠. 병들어가는데 무지하거나 알면서도 무시한다면, 심각한 병증입니다. 극한 기후는 우리의 병증을 시험에 들게 하고 있습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_ 이성복 詩 「그날」 마지막 구절

김이준수(기후와공동체실)
장래희망은 ‘기후민주시민’이다. 인류가 세상을 직조하는 가장 큰 요소는 폭력과 이권이라고 여기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참을 수 없는 슬픔을 견디고, 잡을 수 없는 별이라도 힘껏 팔 뻗어 잡고 싶은 낭만도 함께 품고 있다. 매년 빠지지 않는 소원은 KBO리그 롯데 자이언츠의 우승이다.
[다 함께, 기후 리터러시] ③ 극한 기후 속 공동체 감각 세우기
“그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아스팔트 위에서 열기가 들끓고, 나무들은 바람 한 점 없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_ 한강 《채식주의자》 중에서
숨죽이고 있는 건, 나무뿐만 아니었습니다. ‘극한’의 연속이었던 2025년 여름은 어떤 재해가 들이닥칠지 긴장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는 ‘극한 기후’라고 불러야 할 것 같네요. 기후위기와 연결된 극한 호우와 극한 폭염이 번갈아 닥쳤습니다. 이에 여름이라는 계절의 표정도 바뀌고 있습니다. “여름은 동사의 계절 / 뻗고, 자라고, 흐르고, 번지고, 솟는다”(이재무 詩 「나는 여름이 좋다」 중)라는 광화문글판 문구가 무색해집니다. 어쩌면 앞으로 다가올 여름은 생명과 성장의 감각이 팔딱대는 계절이 아닌 복합적인 재난, 재해, 피해부터 우려하는 계절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사진. 광화문글판 (출처. 교보생명) ]
앞선 글(https://greenasia.kr/greenasia/?idx=166883161&bmode=view)에서 ‘기후 리터러시’를 공동체 역량이자, 공공 인프라로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모든 재난이 그렇듯 기후 재난도 취약한 곳에 피해가 쏟아집니다. ‘기후불평등’입니다. 기후위기 피해가 사회경제적 취약계층에 집중되는 현상입니다. 이들은 기후위기 주요 원인인 탄소 배출이 적은 데도 열악한 주거환경, 건강 문제, 정보 접근의 어려움 등으로 기후 재난에 더 크게 노출돼 있습니다. 극한 기후가 뉴노멀이 된 여름은 이들을 더 힘들고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기후불평등은 지독한 구조적 현실입니다.
기후변화의 재앙 중 하나인 극한 호우는 몇 년 새 여름의 일상처럼 다가오고 있습니다. 기상청이 정의한 바에 의하면, 극한 호우는 1시간에 50mm, 3시간에 90mm를 동시 충족하거나 1시간에 72mm 넘게 오는 비를 뜻합니다. 올여름, 시간당 100mm 안팎의 비가 전국 곳곳에서 내렸습니다. 특히 경남 산청군 시천면에는 나흘간 798mm라는 이른바 어마무시한 비가 쏟아졌습니다. 이러다 보니 수백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비현실적 강우량을 접하는 일도 일상다반사가 되고 있습니다. 연간 호우 빈도를 보면, 시간당 50mm 이상 호우는 1970년대 연평균 8.4회에서 2020년대 23.6회로 늘어났습니다. 근래 극한 호우만 놓고 봐도, 2019년에는 한 차례 있었지만, 2024년에는 시간당 100mm가 넘는 극한 호우가 무려 16번 있었습니다.
장맛비는 과거 양상과 다른 패턴을 보여줍니다. 과거에는 비교적 넓은 지역에 고루 장맛비가 내렸지만, 요즘은 한정된 지역에 순간적으로 많은 양이 세차게 쏟아붓습니다. 기존 강우빈도 등의 패턴에 맞춰진 방수 시설과 재난방재 시스템으로는 감당이 안 되니 피해는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달갑지 않은 기록들이 앞으로 얼마나 갱신을 거듭할지 모르지만, 재난 대책이 과거와 달라져야 함은 분명합니다. 극한 기후를 품은 기후위기에 맞게끔 대책이 이뤄져야 합니다.
여름철 뉴노멀이 된 극한 호우의 원인을 딱 꼬집어 말하긴 어렵다고 합니다. 변수가 워낙 다양한 탓에 대기 구조를 입체적으로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다만 기상 전문가들은 해수면 온도 상승을 원인 중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지구 가열화(Global Heating)로 바닷물이 따뜻해지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증발하는 수증기량이 많아집니다. 대기 수분 함량이 많아진 상태에서 저기압을 만나 비구름대가 커져 포화 상태를 넘어서면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집니다.
[ 사진. 극한 기후1, 2 (출처. 무료이미지사이트 픽사베이) ]
극한 호우가 일정 부분 기후위기 영향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폭염도 마찬가지입니다. 찜통더위라는 말로 부족한 극한 폭염은 ‘열돔(heat dome)’이 빚습니다. 강한 고기압이 정체돼 지표면에서 데워진 열기가 외부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현상을 뜻하는 열돔은 기후위기가 초래한 결과입니다. 북극의 찬 공기와 아열대의 뜨거운 공기를 섞여 온도를 조절하는 제트기류가 북극이 따뜻해지면서 힘을 잃은 까닭입니다. 제트기류는 온도 차가 클수록 빠르고 강해지나 지금은 그렇지 못합니다.
극한 기후에 맞춰 수백 년을 뛰어넘는 인프라를 갖추는 것은 기본입니다. 이에 덧붙여 공동체 감각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극한 기후에 따른 재난을 머나먼 안드로메다 이야기가 아닌 우리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감각 말입니다. 기후위기를 환경 문제로만 여긴다면 큰 오산입니다. 사회적 불평등과 공동체의 문제로 기후위기를 바라볼 때 제대로 된 문제 해결이 가능해집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후 재난은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습니다. 극한 기후 앞에 가난한 사람이, 이주노동자가, 장애인이, 옥외노동자가, 고연령층이, 비인간생물 등이 더워서, 추워서, 비 와서, 불타서 죽습니다. 취약한 부분부터 허물어집니다. 기후 재난은 사회적 격차를 증폭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적 격차는 국가, 사회, 지역, 계층 등을 분리하고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불평등 너머 불평등도 있습니다. 가령 각종 재해를 당하고도 법적 테두리에서 보호나 보상 등을 받지 못하는 이주노동자 등이 해당합니다. 차별 없는 사회안전망 구축과 사회적 기본권 확충이 촘촘해야 할 이유입니다. 기후위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생명을 위협합니다. 누군가는 기후위기를 놓고 계엄을 옹호한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고 늘 있는 일인데, 누가 죽거나 다쳤느냐”며 외면할지 모릅니다. 공동체에 철저하게 해악을 끼치는 언설입니다.
[ 사진. 모두병들었는데 (출처. JTBC '뉴스룸' 화면 갈무리) ]
기후위기는 생명이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더 강력하고 파괴적인 극한 기후가 예고된 시대, 작아도 좋습니다. 공유 우양산, 그늘막 하나, 무더위/한파 쉼터, 생수 등이 생명을 지키는 방패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녀야 할 공동체적 감각은 이렇듯, 작은 마음 씀씀이부터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사람은 심신 한 군데라도 아프면 그곳에 모든 신경이 갑니다. 이런 사람이 모인 우리 사회는 아픈 곳이 많은데, 그만큼 신경을 쓰고 있을까요? 왜 우리는 아픈데, 아프지 않을까요? 더 아래, 밑바닥까지 샅샅이 살피고 보듬을 여력이 없는 걸까요? 더 나쁜 방향으로 갈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와 고통을 내 것 혹은 우리 것처럼 여기거나 여기려고 하는 것이 공동체 감각입니다. 고통의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모두 아픈데 그 아픔을 감지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아픔은 서서히 우리 삶을 갉아먹을 겁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죠. 병들어가는데 무지하거나 알면서도 무시한다면, 심각한 병증입니다. 극한 기후는 우리의 병증을 시험에 들게 하고 있습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_ 이성복 詩 「그날」 마지막 구절
김이준수(기후와공동체실)
장래희망은 ‘기후민주시민’이다. 인류가 세상을 직조하는 가장 큰 요소는 폭력과 이권이라고 여기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참을 수 없는 슬픔을 견디고, 잡을 수 없는 별이라도 힘껏 팔 뻗어 잡고 싶은 낭만도 함께 품고 있다. 매년 빠지지 않는 소원은 KBO리그 롯데 자이언츠의 우승이다.